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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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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릉

(清东陵)

전화 : 0315-6940888
주소 : 中国 河北 遵化 清东陵
개요 :

칭동링(清东陵)은 허베이성(河北省) 준화(遵化), 베이징(北京)에서 동쪽으로 약 125km 떨어진 준화시(遵化市) 마란위(马兰峪)에 위치해 있는 청나라황실 2대 릉묘중의 하나이다.

칭동링(清东陵)은 허베이성(河北省) 준화(遵化), 베이징(北京)에서 동쪽으로 약 125km 떨어진 준화시(遵化市) 마란위(马兰峪)에 위치해 있는 청나라황실 2대 릉묘중의 하나이다.

청동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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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설명

--칭동링(清东陵 qing dong ling 청동릉)


자금성(紫禁城)이 살아 있는 황제들의 공간이라면, 청동릉(清东陵)은 궁극의 화려함이라 할 만한 그 자줏빛 성에서 살던 황제들이 죽어서 묻힌 곳이다. 황제들의 죽음을 위해 디자인된 이곳에는 중국의 마지막 왕조인 청나라의 황제들이 비밀스럽게 잠들어 있다.

청나라 황제들의 주검이 묻힌 청동릉. 입구부터 수많은 문을 거쳐야 황제가 묻혀 있는 지하 황릉을 만날 수 있다. 황제의 권력을 상징하는 용은 황제들이 잠든 이곳에도 여전히 꿈틀거리고 있다. 죽음의 공간에서도 하늘의 아들이라 믿은 황제의 욕망은 잠들지 않고 있다.

청나라 시대 황제들의 주검이 놓여 있는 청동릉 입구에서 자금성이 생각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여섯 개의 기둥이 다섯 개의 문을 만든 석패방(石牌坊)에 한발 들여놓으면 ‘아! 한 세계가 시작되는구나’ 하는 느낌을 절로 받게 된다. 입구의 문턱을 넘는 순간, 끝이 보이지 않는 공간과 아득한 시간이 펼쳐진다. 사람들에게 ‘사후의 자금성’으로 불리는 이곳 청동릉은 청나라의 3대 왕인 순치제가 사냥하러 들렀다가 이곳의 산과 물에 감탄해 황제의 침릉으로 정한 이후 5명의 황제와 15명의 황후, 왕자와 공주를 포함해 161명이 이곳 청동릉에 묻히게 되었다.

중국을 가장 부유하고 강성하게 만든 강희제(청의 4대 왕)와 건륭제(청의 5대 왕) 그리고 ‘철의 여인’으로 불리며 절대 권력을 휘두른 서태후까지 묻힌 곳이기에 이곳의 완벽에 가까운 풍수와 건축의 정교함은 중국의 모든 황릉을 압도한다. 속된 말로 무덤 건축의 ‘발군’이라 할 수 있다.

청동릉 입구에 서 있는 석패방. 높이는 12m가 넘고 너비는 30m가 넘는다. 여섯 개의 기둥이 다섯 개의 문을 만들었다. 다섯 개의 문 중앙을 보면 금성산 金城山의 산세가 뚜렷하다. 청동릉은 하북성 준화(遵化)의 산맥 사이로 넓게 열린 땅으로, 지관들이 ‘만년길지(万年吉地)’로 칭송한 곳인 만큼 좋은 터다. 걸으면서 풍경이 움직이고 요동치는 경험을 할 수 있는 이곳의 기세와 공간 조직은 풍수에 무지한 사람이 보아도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 땅과 건축이다.


효릉(孝陵)

효릉은 청동릉 중심에 위치한 동릉의 제1릉으로서 순치의 묘이다. 강희3년(기원 1664년)에 건조하였는데 크고작은 건축이 80여개나 된 다. 기록에 따르면 순치가 죽은 후 화장하였기 때문에 효릉에는 그의 시체가 없고 골회관만 있을 뿐이다. 민간 전설 에는 “순치가 집을 떠나 승려로 되였다”는 얘기가 있다. 사실상 순치는 집을 떠나 승려가 되려고 머리 깎고 법명까지 얻었는데 황제가 승려가 된다는것은 켤고 쉬운 일이 아니였다.


경릉(강희묘) 景陵(康熙墓)

효릉 동남쪽에 있다. 청나라 강희 황제의 릉침이다. 강희20년(기원 1681년)에 건설하였다. 지면의 건축은 대부분 효릉을 모방하였다.


쌍비원침(双妃圆寝)

경릉 동쪽에 있다. 건륭4년(기원1739년)에 건설 하였는데 이곳에는 강희황제의 두 첩이 잠들어있다. 두 첩은 강희가 아들을 궁중에 들어오게 한후 정성껏 부양해 주었다. 건륭은 아버지의 두 첩에 대해 고마워하며 키워준 은혜를 보답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두 첩은 생전에 건륭황제의 봉전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죽은 후에도 규례를 떠나 단독으로 원침을 건설해 준 동시에 원침의 릉은전 앞에 단봉조양의 계석을 설치하였다.

유릉(건륭묘) 裕陵(乾隆墓)

효릉 서쪽에 있다. 건륭8년(기원 1743년)에 건설하기 시작하여 수십 년 걸렸다. 유릉은 건륭황제의 릉묘이다. 지면건축은 제릉과 비슷하다. 지궁의 깊이는 54m, 면적은 372m2, 전부 돌로 아치형식으로 되어 있다. 제일 마지막 방에는 석제로된 보상이 있는데 중앙은 건륭제의 관이고 옆에는 두 황후와 세 귀비의 영구가 있다. 이 다섯 비는 건륭의 총애를 받아왔는데 건륭이 제일 먼저 사망했다. 건륭관을 넣은 다음 지궁을 봉쇄해 버렸다. 지궁은 석각예술의 보물고이다. 건륭은 89살까지 살았으며 황제로 60년, 또 3년간 태상황으로 있었다. 그는 만년에 불교를 극진 히 신앙하였다. 그의 지궁에는 불상과 불경 경문이 가득했는데 세계에서 보기드문 지하불당을 조성하였다. 건륭은 이러한 신불 들이 자기를 극락세계로 보내주기를 기원하였다.


정릉(함풍릉) 定陵(咸丰)

청동릉 제일 서쪽, 유릉 서쪽에 있으며, 함풍9년(기원 1859년)에 건설 하였다. 정릉은 규모가 매우 방대하지만 전부 낡은 재료들을 사용하였다. 그의 아버지 도광제가 동릉에 건설한 침궁에 물이 들어가 청서릉에 릉침을 다시 짓기로 하였다. 함풍은 별수없이 도광이 허물었던 릉침의 낡은 재료들로 릉을 지었다.

정동릉(定東陵) 자안、자희묘(慈安、慈禧墓)

효릉, 유릉 서쪽에 있는 청나라 함풍황제의 효정 자안황후와 수흠 자희 황후의 릉침이다. 서릉과 나란히 있으며 모양새가 동일하다. 1928년 6월에 전국을 뒤흔든 “동릉주보도난사건”이 발생하였다. 당시 군벌 손전영이라고 있었는데 그의 부대가 준화에 주둔하고 있을 때 규모가 방대한 청나라 동릉건 축군을 보고 큰 부자가 될 기회가 생겼다고 생각하고 릉내의 보물을 훔치기로 마음 먹었다. 사람들의 눈을 속이기 위하여 손전영은 밀령을 내려 공 병영더러 묘를 파게 한 동시에 군사연습을 한다는 부고를 내붙히고 동릉주위에 경계선을 세웠다. 한편 주변의 백성들에게 경제권안에 잘못 들어가면 지뢰를 밟을 수 있다고 엄포했다. 이렇게 그들은 대거 검탈을 감행했는데 손전영이 훔쳐간 보물은 양이 어마어마하다고 한다. 자희 태후는 청나라 광서34년(기원 19 08년) 11월, 임종시에“장의를 너무 성대히 하지 말라”고 암시했다.


혜릉(동치묘) 惠陵(同治墓)

유릉 동쪽에 있다. 광서원년 (기원1875년)부터 3년(기원 1877년) 사이에 건설하였다. 동치황제가 죽을 때 19살 밖에 안되었다. 이 릉은 그가 죽은 후 수건한 것이다.


소서릉 昭西陵(효장문 황후묘)

소서릉은 효릉남쪽에서 5km떨어진 릉구 최남단 대홍문밖에 있다. 혹시 어떤 사람들은 소서릉을 왜서 이곳에 건조했는가고 물을수 있다. 효장문은 원래 황태극의 귀비였다. 순치 를 낳았기 때문에 “태후” 라는 존칭을 얻게 되었다. 손자 강희가 즉위하자 또 그를 존중하여“태후황후”라고 불렀으며 청나라는 그를“효장문황후”라고 불렀다. 그는 원래 심양에 있는 소릉에 안장해야 했는데 효장문 본인의 뜻에 따라 동릉에 건조하였다. 강희황제는 그의 뜻에 따라 그의 영구와 정전을 동릉에 건조하였다. 청동릉은 이미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가격정보: 120위안/인
개방시간: 08:00-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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